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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X 업계의 회색 지대, 덮어둘 수 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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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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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UXer의 현장 수업 ① 그레이존
프로젝트 현장에는 매뉴얼에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직무 사이에 애매하게 걸친 일은 누가 해야 할까요? 반복되는 재작업은 어떻게 줄이죠? 고객의 의중은 또 어떻게 읽고요? 20년 차 이상 UX 전문가 이왕수님이 ‘베테랑 UXer의 현장 수업’을 연재합니다. 수많은 프로젝트에서 겪은 노하우가 정답 없는 문제로 고민 중인 실무자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내 UX 에이전시의 직무는 크게 4가지로 나뉜다. 기획, 디자인, 퍼블리싱, 그리고 개발이다. 프로젝트 팀을 꾸리는 관점에서는 PM, PMO, PL, QA 등 프로젝트 역할에 따른 직책을 따로 구분한다.
이 직무 구분이 처음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퍼블리싱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직무다. 예전에는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마친 뒤 HTML 코딩까지 직접 병행했다. 이후 디자이너의 업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HTML 코딩만 전담하는 ‘코더’라는 직무가 생겼고, 웹표준과 접근성 등 마크업 최적화의 전문성이 부각되면서 ‘퍼블리셔’라는 직무로 발전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발 영역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웹개발’이라는 직무 하나가 HTML 제작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일, 즉 프론트엔드·백엔드 개발, DB 설계, 서버 설정까지 도맡아 수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중 제이쿼리(jQuery)처럼 자바스크립트를 쉽게 쓸 수 있는 프레임워크가 등장하면서, 전문적인 개발 지식이나 논리적인 프로그래밍 경험이 없어도 스크립트 언어를 다룰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이 역할을 퍼블리셔가 맡는 것이 업계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리액트(React)가 업계에서 급속도로 각광받으면서 프론트엔드 전문 인력이 생기는 등 직무 분야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일고 있다.
이처럼 UX 업계는 새로운 기술과 툴이 도입될 때마다 직무 체계 전반이 함께 변해왔다. 왜 그랬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전문성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직무의 파편화, 업무 중첩 영역의 확대
필자는 UX 직종에서만 20년 넘게 일했다. 그동안 지켜본 직무의 변화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일원화에서 파편화로의 진화였다.

예를 들어 웹사이트에 페이지 5개를 추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치자. 이 작업에는 기획자, 디자이너, 퍼블리셔, 개발자가 최소 1명씩은 필요하다. 여기에 영상이나 인터랙티브한 디자인 요소가 들어간다면 해당 기술을 보유한 전문 인력이 한 명 더 필요할 수도 있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업계가 전문화될수록 하나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 위해 더 많은 직무가 필요해졌고, 작업의 선후 관계에 따라 거쳐야 할 단계도 점점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 자체를 문제라고 지적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글의 주제인 모호한 ‘그레이존(회색 지대)’이 생긴다는 점이다. 기획에서 디자인으로, 디자인에서 퍼블리싱으로, 그리고 퍼블리싱에서 개발로 업무가 넘어가는 과정마다 업무가 애매하게 겹치는 영역이 있고, 그 중첩 영역의 R&R(역할과 책임)이 불분명한 그레이존이 존재한다.

기획과 디자인을 예로 들어보자. UX 에이전시나 관련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획자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이건 기획자가 해야 할 일 아닌가?” “이건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 아닌가?”
필자는 기획자 출신이다. 주니어 시절에는 화면을 구성하는 콘텐츠와 정보, 그리고 전시 우선순위까지만 정의하고, 그 화면을 어떤 레이아웃으로 구성할지는 디자이너의 몫이라고 배웠다. 말은 쉽다. 하지만 실제로 화면설계를 하다 보면 문서의 성격상 레이아웃까지 생각하며 정의하게 되고, 이렇게 작성된 화면설계가 디자이너에게 전달되면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화면설계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디자이너의 영역을 침해한다는 반응, 아니면 화면설계 구성과 똑같은 디자인이 도출된다는 반응이다.
기획자들의 스타일도 각양각색이다. 화면설계를 레이아웃과 컴포넌트까지 정교하게 정의해 놓고는 디자이너가 참고만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내놓기를 은연중에 기대하는 기획자가 있는가 하면, 본인이 의도한 화면 그대로 디자인이 나오길 기대하는 기획자도 있다.
그래서 기획의 끝과 디자인의 시작을 잇는 고리에 정답은 없었다. 그저 “높은 퀄리티의 디자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서로 잘 커뮤니케이션하며 풀어가야 한다”라는 두루뭉술한 명목으로 타협해 왔을 뿐이다. 구성원 간에 신뢰와 유대감이 있다면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지만, 다소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진통을 겪게 마련이고, 그 진통을 해소하기 위한 소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뒤따른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직무 간에 겹치는 업무 영역은 누구의 역할인지 특정할 수 없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모적인 커뮤니케이션과 때로는 팀워크의 불협화음을 낳는다. 기획자와 디자이너 사이의 그레이존을 예로 들었지만, 그레이존은 모든 직무 사이에 존재한다.
어떻게 해결했는가
사실 이성적인 접근으로 문제 해결의 ‘정답’을 찾기는 어렵다. 문제라는 인식은 있지만 원인을 특정하기 까다롭기 때문이다. 다만 다년간 프로젝트와 UX 직무를 수행하며 느낀 점은 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그레이존이 프로젝트 전반의 문제로 커지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고, 별문제 없이 원만하게 흘러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프로젝트는 나와 성향이 맞는 구성원들로만 꾸릴 수 없다. 프로젝트 규모가 클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현장에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을까. 필자가 직접 경험한 프로젝트 사례부터 살펴보자.
국내 금융권 대기업 S사의 프로젝트를 맡은 적이 있다. 전사 디지털채널을 운영·유지보수하는 연 단위 대규모 사업이었는데 필자는 사업 수행 1년 차에 PM을 맡았다. 대기업의 모든 디지털 채널을 통합 운영하는 사업이다 보니 여러 부서에서 광범위한 유형의 업무 요청이 쏟아졌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기존 수행 업체로부터 업무를 인수인계 받으며 매우 놀랐던 점은, 그동안 필자가 알던 상식을 깨는 업무 R&R이었다. 업무 프로세스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디자이너가 홈페이지 관리와 배포까지 가능한 CMS를 직접 다룬다거나, 퍼블리셔가 이행을 직접 담당하는 등 디자이너와 퍼블리셔가 본연의 업무 외에 부가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나중에 업무를 파악하고 나서야 이해했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제작 건을 배포해야 하는 프로젝트 특성상, 인력 자원의 유휴를 최소화하고 업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었던 셈이다.
운영 프로젝트는 업무의 연속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기존 업체가 정례화해 놓은 업무 프로세스를 일단 그대로 이어받아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의 요구사항과 환경 변화, 그리고 높아지는 업무 숙련도에 맞춰 업무 프로세스를 계속 발전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사건이 있다. 어떻게 해결했는지 함께 살펴보자.

문제 1. “테스트는 기획자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매일 배포를 해야 했기에, 배포 전후로 테스트가 완벽하게 끝나지 않으면 기획자, 디자이너, 퍼블리셔 모두 퇴근할 수 없었다. 배포 이후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배포가 늦어지거나 이슈가 생기면 퇴근 시간인 6시를 넘기기 일쑤였고, 기껏 야근까지 하며 대기했는데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불만이 폭증했다. “기획자가 테스트해야지 왜 우리까지 테스트를 해야 하나”라는 식이다.
이 문제는 업무가 누구의 역할인지, 즉 R&R 측면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안정성 측면을 먼저 고려해 풀었다. “본인이 관여한 작업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이건 특정 파트만의 책임이 아닌 공동의 책임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배포가 안정적으로 완료되려면 직무와 상관없이 2중, 3중, 4중으로 겹겹이 테스트하고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침을 설득력 있게 공유하기 위해, 테스트 시 무엇을 검증해야 하는지 검증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교육했다.
문제 2. “배너 이미지 자르는 걸 왜 디자이너가 해야 하나요?”
“디자이너는 디자인까지, 웹에 게시하기 위해 필요한 이후 절차는 퍼블리셔가 해야 한다”라는 누군가의 주장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사실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최근에는 피그마 등의 툴 덕분에 공동 작업과 협업이 매우 원활해졌지만, 과거 포토샵 시절에는 일일이 무거운 PSD 파일을 주고받아야 했다. 이미지 하나 자르기 위해 무거운 PSD 파일을 받고, 열고, 잘라내는 작업을 해야 했던 것이다. 퍼블리셔는 이런 ‘비효율’을 개선하고자 이미지나 배너를 잘라내는 단순 작업은 디자이너가 직접 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고, 디자이너는 반대했다. 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입장을 바꿔보면 다 이해가 된다.
이 문제는 업무의 효율 측면을 먼저 바라봤고, 단순 이미지 컷팅은 디자이너가 직접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여담이지만, 이후 디자이너가 자른 배너 이미지가 5MB를 넘었고 해당 이미지가 그대로 앱에 배포돼 화면 로딩 이슈가 발생하는 바람에 주말에 사무실에 끌려 나간 적이 있다. 당시 ‘범인’이었던 디자이너는 경험이 없는 신입이라 이미지의 퀄리티만 생각했을 뿐, ‘웹용으로 저장(Save for Web)’의 개념을 모르고 있었다.
문제 3. “난 한 사람하고만 커뮤니케이션하고 싶다”
이번에는 업무를 요청하고 컨펌해 주는 현업 부서의 컴플레인이었다. 본인은 분명 간단한 공지 페이지 하나를 요청했을 뿐인데, 왜 자꾸 기획자가 컨펌을 요청하고, 다음에는 디자이너가, 또 다음에는 퍼블리셔가 컨펌을 요청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하고만 커뮤니케이션하고 싶은데 너무 번거롭다는 뜻이다. 백 퍼센트 이해가 됐다. 사실 필자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었지만, 업무를 요청하는 다른 현업 담당자들은 불만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만을 위해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났다. 이런 점을 고려해 잘 설득했고, 추후 홈페이지 개편 이후에는 간단한 작업은 굳이 디자이너의 손을 거치지 않고 퍼블리셔가 직접 처리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결국 관건은 ‘약속’과 ‘수용’

세 사건을 다시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일은 누구의 R&R인가”를 따지는 방식으로는 어느 것도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그때그때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판단했다. 어떤 때는 안정성이었고, 어떤 때는 효율이었고, 어떤 때는 형평성이었다. 그레이존에 만능 해법은 없지만, 판단의 기준을 세우고 구성원이 그 기준에 공감하면 풀린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이런 판단이 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프로젝트 차터(Project Charter)를 작성하는 경우가 있다. 프로젝트의 목표와 범위를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해관계자들과 협업하며 생길 수 있는 여러 이슈에 어떻게 대처할지, 그리고 업무 프로세스와 R&R을 어떻게 가져갈지를 처음부터 명확히 세우는 것이다. 물론 여러 업체가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에서 처음부터 거창한 약속을 받아내기는 어렵고, 고객사까지 포함되면 양날의 검처럼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같은 회사에 소속된 구성원끼리라도 내부 착수회의를 거쳐 프로젝트 차터를 공유하고 처음부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크다고 확신한다.
다음으로는 변화에 대한 수용이다. 프로젝트가 처음에 계획하고 약속한 대로 끝까지 원만하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프로젝트는 늘 변화무쌍하고, 이슈를 해결해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은근히 변화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앞의 세 사건도 결국 기존의 R&R을 깨고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이슈를 풀기 위해 초기에 세웠던 플랜이나 약속을 깨고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소한 프로젝트 최전선에 있는 PM과 PL만큼은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의 전망
과거에는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인이 주목을 받았다면, 아이폰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사용자 경험’, 즉 UX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업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물론 지금도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인이 필요한 분야는 많다. 하지만 이제는 디자인도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고, 논리와 근거가 뒷받침돼야 설득이 되는 시대다. 이제 ‘WOW’가 아닌 ‘WHY’의 시대인 것이다. 또한 디지털 온리(Digital Only) 시대로 전환되면서 보조 도구에 그쳤던 디지털 채널이 한 기업의 사업 ‘플랫폼’이 됐고,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UX 생산성 도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처럼 국내외 UX 산업은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업무 생산성 향상’에 초점을 두고 기술과 도구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내 UX 에이전시는 비즈니스 특성과 여러 제약 요인 때문에 ‘직무 체계’ 관점에서는 과거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AI 네이티브 시대가 도래해 바이브 코딩(Vibe Coding) 등 다양한 AI 네이티브 UX 실무 방법론이 연구되고 도입되고 있다. 나날이 발전하는 AI 도구에 모든 업계가 긴장하고 있지만, 필자는 ‘AI가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점이 아니라,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정체돼 있던 UX 산업의 직무 체계가 AI로 인해 드디어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고 보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국내 UX 에이전시의 직무 체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야 할지 방향성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미리 힌트를 던지자면, 기획과 디자인이 합쳐져야 하고, 보유 기술이 아니라 업무 특성에 따른 직무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작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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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도연 (070-7775-9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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